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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세번째 이야기>>를 읽다가
1. 예나 지금이나 좌파의 존재적 모순은 대개의 좌파들이 자신이 대변하는 계급 자체가 아니라는 것, 그 계급 인민의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좌파는 늘 그 모순에 긴장해야 한다. 먹고사는 일을 고민하지 않는 좌파 인텔리의 관념 속에서 그 현실은 잠시 미루어지거나 생략될 수 있다. 싸우다 지치면 잠시 휴가를 다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민에게 그 현실은 미루어질 수도 생략될 수도 없다.(좌파란 무엇인가, 273~274)
→규항형은 좌파가 '자신의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빠지기 쉬운 '분열'을 '모순'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모순에 '긴장'해야 한다고 했다.
2. 저는 '좌파가 어떻게 제 자식을 사교육 시키느냐'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아이 사교육 시키는 사람이 뭐 하러 좌파를 하는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꼭 좌파로 살아야 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좌파로 살아야 한다고 강제한 일이 있습니까? 양심적인 자유주의자로, 이명박 비판하고 조중동 반대하고 촛불시위 참여하고 하면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럽지 않은 삶 아닙니까? 그런데 굳이 자신을 좌파로 규정하면서 불편하게 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중간 줄임) 다시 말씀드리지만 좌파가 그럴 수 있느냐, 난 좌파인데 이래도 되나, 이런 불편함을 버리십시오. 편안하게 사십시오. 다른 사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는 가장 편안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존엄한 권리입니다. 좌파로 사는 게 편하면 좌파로 살면 되는 것이고, 자유주의자로 사는 게 편안하면 자유주의자로 살명 됩니다. 그게 사회에도 본인의 정신 건강에도 좋습니다.(가장 편안하게, 275~276)
→그동안 나의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는 삶 이전의 논리, 행동 이전의 말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느낀 괴리 혹은 분열은 '내가 이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 내 욕망 사이의 갈등'이었다. "에이, 그냥 우파하고 마음 편히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할 것인가'의 문제란 이야기다. '나는 좌파니까'라는 말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내 행동과 삶 자체를 근거로 나를 판단하고("나는 자유주의에 가깝구나.") 그렇게 살면서, 삶의 지향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더 중요하단 이야기다.("좌파의 삶을 좇고 있다.") 어디가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내 삶의 괘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최소한의 상식'을 존중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아파하는' 자유주의 우파 혹은 아나키스트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함께 일하고 먹는 것을 꿈꾸는 좌파의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 딱 이정도겠다. 그게 내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 내 안의 자유를 찾으며 살아가고-이게바로 자유주의자의 입장이다- 앞으로 조금씩 (행동과 삶 자체가) 변화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길이다.
"나는 지금까지 자유주의의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조금씩 좌파의 삶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왜 나는 좌파가 되려고 하는가? 내 입장에선 좌파가 보는 세상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평가와 설명은 행동과 삶 뒤에 있으며, 우리는 행동과 삶을 통해서만 평가와 설명을 뒤집을 수 있다. 삶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3. 버스를 타고 오는데 오랜만에 6800번이 낮인데도 가득찼다. 예전, 아침 출근길에는 늘 바글거렸다. 운이 좋으면 앉아서 가는데 출발부터 끝까지 앉아가자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끝까지 불편하다. 불편한 이유는 이렇다. "일찍 탄 건 그저 운일 뿐인데 내가 이렇게 자리를 독점해도 되나?"
오늘은 한 아저씨가 복사물을 잔뜩 들고 전화기를 귀와 어깨에 걸친 채 애쓰고 있길래 그 복사물을 받아 내 무릎에 올려두었다.
"저기요."
부르며 팔꿈치를 톡톡 치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여기 두세요."
"괜찮은데..."
부드럽게 웃으며 "괜찮아요. 여기 두세요."
"그럼, 고맙습니다."
이를 테면, 이렇게 자리에 앉아 남의 짐을 들어주는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유주의 우파'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다른 사람과 나눠 앉는 사람이 '좌파'다.
각자 자리를 독점하는 상황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선행 정도'하는 것과 자리를 독점하는 상황 자체를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우파와 좌파의 차이다.
4. 규항은 글을 잘 쓴다. 그가 글을 쓰는 규칙은 이런 거란다.
"쉬운 말로 쓸 것. 그리고 읽었을 때 운율(리듬)이 읽힐 것."
그가 들어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에 담긴 글쓰기 비법은 이렇다.
"(예수가 그러했듯이)비유를 쓸 것. 쉬운 예를 들 것. 그리고 (대화를 포함하여) 묘사할 것."
5. 위에 이야기한 자리 양보와 관련해서, 나는 자리 양보를 잘 안 한다. 왜일까?
무언가 '착한 일'을 하려고 치면 어디선가 '네가 무슨 착한척이야?'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것은 부끄러움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주저하게 되는 것 같다.
어차피 자유주의적 행동이든 좌파의 행동이든 그것은 '내 기쁨'을 위할테고, 결국 '다른 이와 나누는 행복'으로 통할 텐데, 부끄러움과 망설임이 왠 상관이랴.
6. 버스에서 내려서 학교에 들어오기까지 든 생각 둘.
6-1. 압구정에는 성형외과도 많고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채 혼자서 혹은 어머니와 둘이 걸어가는 아가씨들도 많다. 아이들 역시 '외모'에 대한 고민을 빼놓지 않는다. 우리가 어릴 때에도 물론, 외모는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한 때의 고민'으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오랫 동안 화두가 되는 걸 보면 정말 우리사회는 '외모지상주의'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누구도 '외모'를 화두로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테면 '사회적 화두'가 된 셈인데, 외모가 사회적 화두인 사회는 정상인가?
6-2. 한 아저씨가 전화했다.
"ㄴ머하ㅣㅇ 인데요."
"네?"
"케ㅇㅓㅎㅁ티인데요."
"케이티요?"
"네."
"저 결합상품..."
"죄송합니다. 관심 없습니다."
"네...네에."
아저씨는 머뭇, 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이런 전화를 받고나면 늘 기분이 안 좋다.
전화로 무언가를 강요하는 그들. 먹고 살기 위해 잡은 일자리가 그것인 그들.
딱 잘라 말하지 않으면, 집요하고 공격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들.
그들이 하루에 받는 거절의 양과 그들이 꾀고 홀려 올릴 '실적'의 양 사이가 모두 슬펐다.
노동도 이런 지랄맞은 노동-다른 사람을을 괴롭히며 실적을 올리는 노동-이 없다.
1. 예나 지금이나 좌파의 존재적 모순은 대개의 좌파들이 자신이 대변하는 계급 자체가 아니라는 것, 그 계급 인민의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좌파는 늘 그 모순에 긴장해야 한다. 먹고사는 일을 고민하지 않는 좌파 인텔리의 관념 속에서 그 현실은 잠시 미루어지거나 생략될 수 있다. 싸우다 지치면 잠시 휴가를 다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민에게 그 현실은 미루어질 수도 생략될 수도 없다.(좌파란 무엇인가, 273~274)
→규항형은 좌파가 '자신의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빠지기 쉬운 '분열'을 '모순'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모순에 '긴장'해야 한다고 했다.
2. 저는 '좌파가 어떻게 제 자식을 사교육 시키느냐'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아이 사교육 시키는 사람이 뭐 하러 좌파를 하는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꼭 좌파로 살아야 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좌파로 살아야 한다고 강제한 일이 있습니까? 양심적인 자유주의자로, 이명박 비판하고 조중동 반대하고 촛불시위 참여하고 하면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럽지 않은 삶 아닙니까? 그런데 굳이 자신을 좌파로 규정하면서 불편하게 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중간 줄임) 다시 말씀드리지만 좌파가 그럴 수 있느냐, 난 좌파인데 이래도 되나, 이런 불편함을 버리십시오. 편안하게 사십시오. 다른 사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는 가장 편안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존엄한 권리입니다. 좌파로 사는 게 편하면 좌파로 살면 되는 것이고, 자유주의자로 사는 게 편안하면 자유주의자로 살명 됩니다. 그게 사회에도 본인의 정신 건강에도 좋습니다.(가장 편안하게, 275~276)
→그동안 나의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는 삶 이전의 논리, 행동 이전의 말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느낀 괴리 혹은 분열은 '내가 이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 내 욕망 사이의 갈등'이었다. "에이, 그냥 우파하고 마음 편히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할 것인가'의 문제란 이야기다. '나는 좌파니까'라는 말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내 행동과 삶 자체를 근거로 나를 판단하고("나는 자유주의에 가깝구나.") 그렇게 살면서, 삶의 지향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더 중요하단 이야기다.("좌파의 삶을 좇고 있다.") 어디가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내 삶의 괘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최소한의 상식'을 존중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아파하는' 자유주의 우파 혹은 아나키스트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함께 일하고 먹는 것을 꿈꾸는 좌파의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 딱 이정도겠다. 그게 내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 내 안의 자유를 찾으며 살아가고-이게바로 자유주의자의 입장이다- 앞으로 조금씩 (행동과 삶 자체가) 변화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길이다.
"나는 지금까지 자유주의의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조금씩 좌파의 삶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왜 나는 좌파가 되려고 하는가? 내 입장에선 좌파가 보는 세상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평가와 설명은 행동과 삶 뒤에 있으며, 우리는 행동과 삶을 통해서만 평가와 설명을 뒤집을 수 있다. 삶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3. 버스를 타고 오는데 오랜만에 6800번이 낮인데도 가득찼다. 예전, 아침 출근길에는 늘 바글거렸다. 운이 좋으면 앉아서 가는데 출발부터 끝까지 앉아가자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끝까지 불편하다. 불편한 이유는 이렇다. "일찍 탄 건 그저 운일 뿐인데 내가 이렇게 자리를 독점해도 되나?"
오늘은 한 아저씨가 복사물을 잔뜩 들고 전화기를 귀와 어깨에 걸친 채 애쓰고 있길래 그 복사물을 받아 내 무릎에 올려두었다.
"저기요."
부르며 팔꿈치를 톡톡 치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여기 두세요."
"괜찮은데..."
부드럽게 웃으며 "괜찮아요. 여기 두세요."
"그럼, 고맙습니다."
이를 테면, 이렇게 자리에 앉아 남의 짐을 들어주는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유주의 우파'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다른 사람과 나눠 앉는 사람이 '좌파'다.
각자 자리를 독점하는 상황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선행 정도'하는 것과 자리를 독점하는 상황 자체를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우파와 좌파의 차이다.
4. 규항은 글을 잘 쓴다. 그가 글을 쓰는 규칙은 이런 거란다.
"쉬운 말로 쓸 것. 그리고 읽었을 때 운율(리듬)이 읽힐 것."
그가 들어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에 담긴 글쓰기 비법은 이렇다.
"(예수가 그러했듯이)비유를 쓸 것. 쉬운 예를 들 것. 그리고 (대화를 포함하여) 묘사할 것."
5. 위에 이야기한 자리 양보와 관련해서, 나는 자리 양보를 잘 안 한다. 왜일까?
무언가 '착한 일'을 하려고 치면 어디선가 '네가 무슨 착한척이야?'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것은 부끄러움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주저하게 되는 것 같다.
어차피 자유주의적 행동이든 좌파의 행동이든 그것은 '내 기쁨'을 위할테고, 결국 '다른 이와 나누는 행복'으로 통할 텐데, 부끄러움과 망설임이 왠 상관이랴.
6. 버스에서 내려서 학교에 들어오기까지 든 생각 둘.
6-1. 압구정에는 성형외과도 많고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채 혼자서 혹은 어머니와 둘이 걸어가는 아가씨들도 많다. 아이들 역시 '외모'에 대한 고민을 빼놓지 않는다. 우리가 어릴 때에도 물론, 외모는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한 때의 고민'으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오랫 동안 화두가 되는 걸 보면 정말 우리사회는 '외모지상주의'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누구도 '외모'를 화두로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테면 '사회적 화두'가 된 셈인데, 외모가 사회적 화두인 사회는 정상인가?
6-2. 한 아저씨가 전화했다.
"ㄴ머하ㅣㅇ 인데요."
"네?"
"케ㅇㅓㅎㅁ티인데요."
"케이티요?"
"네."
"저 결합상품..."
"죄송합니다. 관심 없습니다."
"네...네에."
아저씨는 머뭇, 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이런 전화를 받고나면 늘 기분이 안 좋다.
전화로 무언가를 강요하는 그들. 먹고 살기 위해 잡은 일자리가 그것인 그들.
딱 잘라 말하지 않으면, 집요하고 공격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들.
그들이 하루에 받는 거절의 양과 그들이 꾀고 홀려 올릴 '실적'의 양 사이가 모두 슬펐다.
노동도 이런 지랄맞은 노동-다른 사람을을 괴롭히며 실적을 올리는 노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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