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生生!
출근버스 명상
"홀가분"
2010. 12. 29. 10:17
일요일에 장원당 첫 근무를 할 땐 미처 몰랐네.
도서관에서 잠깐 잠깐 오전 근무할 때까지만 해도 미처 몰랐네.
평일 아침 출근 버스가 이렇게 미어미어터지는 줄은.
눈이 온 탓일까? 평소에 출근시간이면 10분 간격으로 자주 다니던 6800번 버스가
출근시간 아닐 때엔 20~30분 간격으로 다니던 이 버스가
일요일 저녁, 어제 저녁, 그리고 오늘 아침 배차 간격이 두 배로 늘었다.
처음엔 앞차가 퍼졌나 싶었고, 다음날엔 허, 운때 참 안 맞네, 했고
오늘은 어라? 아예 배차 간격이 더 벌어진 건가? 싶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평일 아침 출근 버스는
두 팔로 손잡이를 잡을 수 없고
하필 오늘 따라 도시락에 책에 무겁고 큰 내 가방이 민망하며
내 다리 사이에 남의 다리가 들어오고도 비좁은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이 오르고 또 올라 차문을 닫을 수 없게 되자
기사님은 안으로 좀 들어가 주세요 안으로 좀 들어가 주세요 안으로좀들어가
달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으나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있거나 귀에 이어폰을 이미 꽂았거나
잠깐 고개를 돌려 누구 움직이는 사람 없나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결국 서있던 사람들을 움직인 건
이미 더 서 있을 곳도 없어보이는 버스 앞뒷문으로 밀고 들어온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 모양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는데
"왜 사람들은 자기 서있는 자리-그나마 조금이라도 기댈 수 있고 손잡이라도 잡을 수 있는-에
꼭 매달려 한 치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 출근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무표정, 들은체만체, 밀고 들어가도 함께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게 보수"라던 규항의 말이 떠올랐고
'그 쪼끔' 움직이는 게 귀찮아 저러고들 서 있으니,
이미 앞뒷문 주변은 사람들이 한 덩이가 된 지 오래지만
그 사이의 복도는 그래도 띄엄띄엄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어쩜 저리도 무관심할까?
어쩜 저리도 한결같이 눈을 감고 있을까?
기사님은 계속 들어가 달라고 소리치고
앞뒤 출입문 주변에선 사람들이 밀고 밀치며 우왕좌왕하는데
복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다른 사람 몸에 자기 몸이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보수란 게 특별한 게 아니고
우연(조금 버스에 일찍 타게 됨)에 의해 얻은 자기의 편안함을
내놓지 않으려는 것,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아침 출근 버스로 출퇴근하는,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지? 싶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대부분 쉽게 짜증을 내게 되는 대상, 버스기사님탓도 아니고
아침마다 꽉찬 버스로 출퇴근 해야하는 나와 같은 '이 사람들'때문도 아닐 것이다.
출퇴근 시간에 사람이 이렇게 몰리는데도 버스를 늘리지 않는 버스회사가 문제의 핵심이겠지.
"사람들이 왜들 그래요? 조금씩만 뒤로 물러나면 그래도 탈 만 하겠구마는. 어쩜 저렇게 안 움직일까?"하는 말은 버스기사님이 한다면 적절한 말이겠지만 버스회사가 할 말은 아니며 서로 이해하고 안쓰러워하며 한 세상을 살면 족할 같은 처지의 내가 할 말도 아니다.
이 세상엔 제 것을 움켜 쥐고 놓치 않으려는 더 큰 보수들이 많고 많은데
왜 하필 아침마다 꽉 찬 버스를 타고 피곤에 절어 쓰러질 듯 출근을 하는
이 사람들을 보수니, 제 것만 생각한다느니 하며 비난하고 있나? 싶어 깜짝 놀랐다.
한 발 짝만 더 뒤에서 본다면
아침 출근 버스 안에서 내가 본 사람들의 모습이란
피곤에 절고 일상에 눌려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움켜쥔 것도 아닌 그저 많아야 자리 하나, 기껏해야 내 한 몸 세울 공간 정도
차지하고 앉은 그런 모습 아니던가.
일상에서 보수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로는 진보를 외치면서 보수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문제의 핵심과 진짜 비판 받아야 할 세력이 무언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제 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것은 물론 더 늘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병들게 하고, 수시로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전쟁 위협을 일삼는 자들에 대해 한 줄의 글도 쓰지 않는 내가 아침에 버스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사람들에게서 '보수'를 읽는다? 조선일보가 좋아할 노릇이다.
이해와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비판은 결국 비난일 뿐이고,
내가 먼저 실천하고 실천을 통해 배운 걸 나누는 게 아닌 모든 비판은 말로만 전달되는 화일 뿐이며, 비판의 대상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라면 결국 자기 부정일 뿐이다.
'일상의 보수'를 발견하는 일은 나의 이중성을 스스로 알아채고 변화하기 위한 도구로만 쓰여야한다.
*글 안 쓰고 살다가 어제 오늘 연이어 글 쓰다.
글 안 쓰고 살 때는 이렇다.
즐겁게 하루 하루 살고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하루하루 버티고 있거나.
글 많이 쓰고 살 때는 이렇다.
불안과 걱정이 커져 자기 방어가 심하거나, 삶의 경험에서, 시간이 된다면 책을 읽으며 배우는 게 많거나.
글이란 내 상황과 리듬에 따라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는데
수업 커리큘럼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글쓰기 수업이란
얼마나 교사 중심의 리듬인가? 이걸 어떻게 깨서 아이들이 스스로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판을 만들지?
도서관에서 잠깐 잠깐 오전 근무할 때까지만 해도 미처 몰랐네.
평일 아침 출근 버스가 이렇게 미어미어터지는 줄은.
눈이 온 탓일까? 평소에 출근시간이면 10분 간격으로 자주 다니던 6800번 버스가
출근시간 아닐 때엔 20~30분 간격으로 다니던 이 버스가
일요일 저녁, 어제 저녁, 그리고 오늘 아침 배차 간격이 두 배로 늘었다.
처음엔 앞차가 퍼졌나 싶었고, 다음날엔 허, 운때 참 안 맞네, 했고
오늘은 어라? 아예 배차 간격이 더 벌어진 건가? 싶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평일 아침 출근 버스는
두 팔로 손잡이를 잡을 수 없고
하필 오늘 따라 도시락에 책에 무겁고 큰 내 가방이 민망하며
내 다리 사이에 남의 다리가 들어오고도 비좁은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이 오르고 또 올라 차문을 닫을 수 없게 되자
기사님은 안으로 좀 들어가 주세요 안으로 좀 들어가 주세요 안으로좀들어가
달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으나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있거나 귀에 이어폰을 이미 꽂았거나
잠깐 고개를 돌려 누구 움직이는 사람 없나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결국 서있던 사람들을 움직인 건
이미 더 서 있을 곳도 없어보이는 버스 앞뒷문으로 밀고 들어온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 모양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는데
"왜 사람들은 자기 서있는 자리-그나마 조금이라도 기댈 수 있고 손잡이라도 잡을 수 있는-에
꼭 매달려 한 치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 출근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무표정, 들은체만체, 밀고 들어가도 함께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게 보수"라던 규항의 말이 떠올랐고
'그 쪼끔' 움직이는 게 귀찮아 저러고들 서 있으니,
이미 앞뒷문 주변은 사람들이 한 덩이가 된 지 오래지만
그 사이의 복도는 그래도 띄엄띄엄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어쩜 저리도 무관심할까?
어쩜 저리도 한결같이 눈을 감고 있을까?
기사님은 계속 들어가 달라고 소리치고
앞뒤 출입문 주변에선 사람들이 밀고 밀치며 우왕좌왕하는데
복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다른 사람 몸에 자기 몸이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보수란 게 특별한 게 아니고
우연(조금 버스에 일찍 타게 됨)에 의해 얻은 자기의 편안함을
내놓지 않으려는 것,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아침 출근 버스로 출퇴근하는,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지? 싶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대부분 쉽게 짜증을 내게 되는 대상, 버스기사님탓도 아니고
아침마다 꽉찬 버스로 출퇴근 해야하는 나와 같은 '이 사람들'때문도 아닐 것이다.
출퇴근 시간에 사람이 이렇게 몰리는데도 버스를 늘리지 않는 버스회사가 문제의 핵심이겠지.
"사람들이 왜들 그래요? 조금씩만 뒤로 물러나면 그래도 탈 만 하겠구마는. 어쩜 저렇게 안 움직일까?"하는 말은 버스기사님이 한다면 적절한 말이겠지만 버스회사가 할 말은 아니며 서로 이해하고 안쓰러워하며 한 세상을 살면 족할 같은 처지의 내가 할 말도 아니다.
이 세상엔 제 것을 움켜 쥐고 놓치 않으려는 더 큰 보수들이 많고 많은데
왜 하필 아침마다 꽉 찬 버스를 타고 피곤에 절어 쓰러질 듯 출근을 하는
이 사람들을 보수니, 제 것만 생각한다느니 하며 비난하고 있나? 싶어 깜짝 놀랐다.
한 발 짝만 더 뒤에서 본다면
아침 출근 버스 안에서 내가 본 사람들의 모습이란
피곤에 절고 일상에 눌려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움켜쥔 것도 아닌 그저 많아야 자리 하나, 기껏해야 내 한 몸 세울 공간 정도
차지하고 앉은 그런 모습 아니던가.
일상에서 보수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로는 진보를 외치면서 보수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문제의 핵심과 진짜 비판 받아야 할 세력이 무언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제 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것은 물론 더 늘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병들게 하고, 수시로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전쟁 위협을 일삼는 자들에 대해 한 줄의 글도 쓰지 않는 내가 아침에 버스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사람들에게서 '보수'를 읽는다? 조선일보가 좋아할 노릇이다.
이해와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비판은 결국 비난일 뿐이고,
내가 먼저 실천하고 실천을 통해 배운 걸 나누는 게 아닌 모든 비판은 말로만 전달되는 화일 뿐이며, 비판의 대상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라면 결국 자기 부정일 뿐이다.
'일상의 보수'를 발견하는 일은 나의 이중성을 스스로 알아채고 변화하기 위한 도구로만 쓰여야한다.
*글 안 쓰고 살다가 어제 오늘 연이어 글 쓰다.
글 안 쓰고 살 때는 이렇다.
즐겁게 하루 하루 살고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하루하루 버티고 있거나.
글 많이 쓰고 살 때는 이렇다.
불안과 걱정이 커져 자기 방어가 심하거나, 삶의 경험에서, 시간이 된다면 책을 읽으며 배우는 게 많거나.
글이란 내 상황과 리듬에 따라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는데
수업 커리큘럼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글쓰기 수업이란
얼마나 교사 중심의 리듬인가? 이걸 어떻게 깨서 아이들이 스스로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판을 만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