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生生!
자필 이력서
"홀가분"
2007. 1. 4. 03:33
태안여자고등학교에서 정교사 모집을 하는데 자필이력서를 쓰라고 한다.
방바닥에 배깔고 누워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되짚어가며 이력서를 채웠다.
자격증 하나 없지만 살아오면서 '이력'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을 모으니
이력서 한 장이 꽉 찼다.
이걸 받아보면 태안여고 사람들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게 이력서야?"하겠지만
내 삶의 분명한 단면을 옮겨 놓았다.
물론 자세한 월(月)이 기억이 안나 대충 써 놓은 것도 있고,
여기에 빠진 것은 훨씬 더 많지만.
어떻게 '몇년, 몇월, 몇일 무엇'이 쓰인 몇 줄로 그 사람의 이력을 알랴.
내 이력서만 보면 상당히 열심히 살아온 청춘같이 보이지만
그 행간에 담긴 방황과 뭉기적이 훨씬 많았던 게 내 청춘이다.
내 청춘에 숨을 틔우고 싹을 보였던 모든 사랑이야기가 빠졌다는 것 만으로 이 이력서는 헛것이다.
결국 가장 부지런했던 시절의 부지런한 명찰들만 모아놓은 게 내 이력서가 되어 버렸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그 명찰마저 잊을 듯 해서 여기 옮긴다.
1995년 3월 1일 충남고등학교 입학
1998년 2월 10일 충남고등학교 졸업
(그 시간 동안의 쓰리고 아픈 자학의 기억은 사라졌다. 저 뒤에 붙여서 보낼 생활기록부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모범생이란 말만 되풀이 된다.)
1998년 대전 대학학원에서 재수 생활
(보영이 누나를 좋아했었다는 이야길 쓰고 싶어서 한참 참음)
1999년 3월 1일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입학
(1999년 9월 슬기에게 맞아서 턱뼈가 부러짐. 혈중 알콜 농도가 짙어서 수술 일주일 미뤄짐.
병실에서 방명록을 만들었는데 친구들이 한 권을 다 채워주더라-뭐 이런 일들이 떠오름)
2000년 3월 10일 휴학, 귀향해서 <오동공업사>에서 장구와 북 만듦.
('만듬'이라고 썼다가 수정테이프로 지우고 '제작'이라고 씀. 만듬? 만듦? 궁금해서
국립국어연구원에 물어보니 '만듦'이란다. 그래서 다시 지우고 만듦이라고 씀.
수정테이프 자국에 크고 진한 글씨로 '만듦'이라고 써 넣게 되었다.)
2000년 9월 1일 복학
(일행시 '사랑: 빨어 빨어 존나 빨어 싸싸 존나 싸' 뭐 이런 시를 시창작의 이론과 실기 시간에
써 냈다가 칭찬을 받았던가 욕을 먹었던가? 여튼 날카로운 감수성의 시절이었다. [대체 뭐가..]
현문반 아이들과 '현문 시화전'을 다시 연 해이기도 하다. 시화전 이름은 신대철 시인의 시
'다시 무인도를 위하여'에서 따온 "우리를 노을로 알고 오는 사람은 없을까요?"였지 아마.
현문반 아이들을 캠에 담아 고대방송국에서 일하던 혜선이의 도움으로 비디오 편집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거 리허설 때 재생버튼인 줄 알고 녹화버튼을 눌러서 제일 신경 많이 쓴
'초반 5분 죽이는 장면'을 날렸지, 아마.
그러고 보니 소중하며 미안한 기억, 애증의 교차로인 아우름-풍물학회-과 현대문학반을
이력에서 빼먹었네. 지금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학회를 두 개 하면서 두 학회를 함께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게 꼭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라고 기억되는데, 아우름 사람들과 불편해지면
현문반 활동을 열심히 하고, 현문반 사람들이 마음에 안들면 아우름 가서 찔벅대고 그랬던 것 같다.
정말 어리석은 인생이었다.)
2001년 3월 1일 휴학, <세븐일레븐> 야간조로 100일 동안 근무
<이화주막>에서 홀서빙
(원배와 성천형을 만났던 때다. 원배와 살면서 나는 조금 더 클 수 있었다. 그 때 막 스무살, 가출해서
무턱대고 날 찾아온 녀석이 벌써 제대해서 스물여섯이 되다니.)
2001년 9월 1일 복학
2001년 9월 20일 자퇴, 자퇴 후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사무보조.
2002년 3월 1일 귀향, <유성 농수산물 공판장 구내식당>에서 한, 중, 일식 배달
2002년 9월 1일 재입학
(2003년 1월에 임실 필봉으로 아우름 사람들과 1주일 동안 첫 전수를 간 기억이 난다.
함께 악기치며 노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지 몸으로 알던 때다.
같이 갔던 새내기들은 집에 가고 싶어 몸을 뒤트는데
나는 아무 할 일 없이 밥먹고, 악기치고, 술먹고, 자고, 밥먹고-해서
무척 해맑게 행복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내 대학 이력에서 몇 안 되는 소중한 이력인 농활도 다 빼먹었네.
나 혼자 새벽에 인력소개소를 뒤져 노가다를 처음 뛴 것도 이 때였던 것 같아.)
2003년 7월 이때부터 방학마다 <우리교육> 교사 연수 아카데미 진행도우미로 일함.
상담연수, 학급운영, 교육학 등 10여개의 강좌를 2006 겨울까지 진행, (무료) 수강
2004년 4월 <에듀네트 학원>에서 중1~고3 국어과 강사. 2005년 9월까지 아이들을 만남
2004년 4월 과내의 첫 국어교육 연구모임인 <신나는 국어교육>을 만들고 시작. 모임원들과 국어교육
관련 책과 논문을 공부
(사실 모임을 '만든' 건 종윤형인데, 모임의 초기 멤버 어쩌고 하기 좀 그래서 그냥 만들었다고 썼다.
모임 만들 때 이야기 같이 나누고 했으니 괜찮겠지요, 종윤형.
공부방 이야기는 쓸까?하는 유혹에 부딪혔다가 그만 두었다. 사실 이력서를 세 번 썼는데, 두 번째에
2004년 9월 공부방 시작, 중1 국어교사로 자원, 2005년 9월에 갑작스레 그만두게 된 것을 지금까지
후회, 라고 썼다가 세 번째에 뺐다. 공부방에 대한 기억은 내게 정말 가슴 아프고 죄송스런 기억인데
그걸 이력서에 쓰려고 했다니, 미쳤지 내가.)
2004년 11월 과 학술제에서 <신나는 국어교육> 학술발표.
일년 간의 학원 경험과 공부를 바탕으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맡아서 발표.
(사실 부끄러운 글이다. 저 정도 분량의 글을 처음 써 보아서 써 낸 것 자체는 대견스럽고,
내가 하는 고민을 아이들과 함께 풀어가려는 '시도'는 멋졌으나 이론만 있고 실제가 빠져버려
분자만 큰 가분수가 되었다. 그 뒤에 계속 연구-실천했으면 뭐, 그 분야의 대가가 되었겠지만
내 가장 큰 단점이 그렇듯, 그 뒤가 좀 더질더질 되었다.)
2005년 2월 독서교육을 공부하기 위해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교사들>모임에 가입, 공부
(요건 사실 좀 부풀리기지 싶다. 책따세 모임에 나가긴 했지만 공부라기 보단 회의가 길었고,
책따세 모임을 6월까진가 하고 그 뒤엔 띄엄띄엄 나갔으니까. 하지만 모임을 꾸려가는 선생님들의
열정과 방법을 '곁에서' 잘 보았고 그것은 큰 공부가 되었겠지. '독서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걸
(남이 준, 돈 주고 산 자격증이 없으니) 스스로 증명하려고 썼다. 써놓고 보니 '독서논술이 대세요
유행이요 메인 스트림인 지금의 시절을 약삭 빠르게 잘 타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아니냐? 아니냐? 아니냐?)
2005년 4월 글쓰기 교육을 깊이 알기 위해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 자료회원으로 가입,
매달 교사들의 성과를 배움
(회보를 받아본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글쓰기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걸 증명하려 했으나 '논술이
대세요 유행인.....' 휴. 신경 끄자.)
2005년 9월 대안교육공부모임인 <교육사랑방>에 가입하여 일반-대안학교 교사, 공부방 상근자와
교사, 학부모, 학생, 교수 등과 대안교육을 공부.
2005년 9월부터2006년 3월까지 고대 교우회보의 <교우회 70년사>란 1000쪽 가까이 되는
책을 한글 작업으로 문서화. 책 속의 한자를 한글로 옮기며 한자, 워드 공부 톡톡히.
(한자, 워드 자격증이 없어서 역시. '잊어 버릴 뻔 했는데' 내게 참 '기억에 많이 남았던' 일이다.
장학금을 받고 했던 일인데, 생각보다 일이 많아서 '씨벌!'했다. 같이 일하던 친구는 성질 버렸다.
부록이 100쪽인데 90%가 한자로 된 사람이름 목록이다. 그걸 다 한글로......하고 나니
담당 교수가 "아 그 부록도 했어? 안 해도 되는데..."했다. 허탈하고 그러진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일을 끝냈다는 생각에 너무 좋아서. 그 때 과사무실 컴퓨터(과사무실 조교보조도 했었지. 1년동안)와
보선이와 형훈이, 채영이가 빌려준 노트북과 규호가 빌려준
전자사전을 내 것 삼아 일을 해서 끝마칠 수 있었다. 음악 무지 들어댔다.
루시드 폴 2집과 김범수의 리메이크 앨범, UMC, 모던 쥬스를 그 겨우내 들어댔다.
동운형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외롭지 않을 수 있었고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가을-겨울이기도.
동운형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1년이 이때부터다.)
2006년 4월 경기도 성남의 대안학교인 <이우학교>로 교육실습
(아이들과 더 가까워지지 못한 게, 교생 끝난 뒤에도 아이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 받지 못한 게
아쉽지만 멋진 선생님들을 만나고 계속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내게 참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이우학교에 가서 100분의 수업을 하고, 교사들의 열린 문화를 맛보고,
아이들의 모습을 들여다 본 것은 참 소중한 경험이었다.
소희를 만날 수 있었으니 이건 뭐 더할 나위 없기는 물론.....)
2006년 8월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졸업하고 나서 우연히 맡게 된 <문승기 수기집 원고 교정>일 역시 기억해 둘 만하다. 그 원고는 결국
<난, 논술로 갔다>란 책으로 나왔다. 논술 잘 써 서울대 법대 들어간 친구 글을 수정하게 되다니.
원고의 70%정도가 교정에 의해서, 교정의 70%는 편집에 의해서 책 꼴을 갖춰가는 모습을 봤다.
일을 맡겨주고, 월급도 대신 가불해주기까지 한 은혜의 은혜는 스승의 은헤.....)
* 학원을 그만둔 2005년 9월부터 지금까지 일년 반 동안 작정하고 백수생활을 하며 여유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음
(이라고 마지막에 쓰면서 '그럼 계속 여유로우세요'라고 할까봐 조금 걱정이 되긴 했음.)
괄호가 더 많아서 글이 길어졌다. 내 청춘의 어느 부분-번쩍이는 명찰의 부분-을 이렇게 기록해 놓으면
나중에 필요할 때 기억을 잘 끄집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적어 놓는다.
하지만 명심할 것! 이 일들, 특히 괄호 안의 일들은 교생과 졸업을 빼면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일들이
어서 이력서를 쓰는 오늘에도 사실 긴가민가, 정말 있었나 내가 만들어 낸 건 아닌가,
고민되는 일들이란 것! 특히 여기에 쓰인 월과 일은 절대 믿을 게 못 된다.
나중에 이 이력을 이용할 때는 주의할 것.
혹시나 "예전 몇년도 몇월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나"식의 논쟁을 하게 된다면
절대로 이 글을 근거 삼지 말 것!
(근데 이걸 이력서로 봐줄까? 결국 내 이력서도 언젠가는 규범의 틀 속에 갇힐 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이력서. 헐! 그 전에 자리를 잡아야겠다.)
방바닥에 배깔고 누워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되짚어가며 이력서를 채웠다.
자격증 하나 없지만 살아오면서 '이력'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을 모으니
이력서 한 장이 꽉 찼다.
이걸 받아보면 태안여고 사람들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게 이력서야?"하겠지만
내 삶의 분명한 단면을 옮겨 놓았다.
물론 자세한 월(月)이 기억이 안나 대충 써 놓은 것도 있고,
여기에 빠진 것은 훨씬 더 많지만.
어떻게 '몇년, 몇월, 몇일 무엇'이 쓰인 몇 줄로 그 사람의 이력을 알랴.
내 이력서만 보면 상당히 열심히 살아온 청춘같이 보이지만
그 행간에 담긴 방황과 뭉기적이 훨씬 많았던 게 내 청춘이다.
내 청춘에 숨을 틔우고 싹을 보였던 모든 사랑이야기가 빠졌다는 것 만으로 이 이력서는 헛것이다.
결국 가장 부지런했던 시절의 부지런한 명찰들만 모아놓은 게 내 이력서가 되어 버렸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그 명찰마저 잊을 듯 해서 여기 옮긴다.
1995년 3월 1일 충남고등학교 입학
1998년 2월 10일 충남고등학교 졸업
(그 시간 동안의 쓰리고 아픈 자학의 기억은 사라졌다. 저 뒤에 붙여서 보낼 생활기록부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모범생이란 말만 되풀이 된다.)
1998년 대전 대학학원에서 재수 생활
(보영이 누나를 좋아했었다는 이야길 쓰고 싶어서 한참 참음)
1999년 3월 1일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입학
(1999년 9월 슬기에게 맞아서 턱뼈가 부러짐. 혈중 알콜 농도가 짙어서 수술 일주일 미뤄짐.
병실에서 방명록을 만들었는데 친구들이 한 권을 다 채워주더라-뭐 이런 일들이 떠오름)
2000년 3월 10일 휴학, 귀향해서 <오동공업사>에서 장구와 북 만듦.
('만듬'이라고 썼다가 수정테이프로 지우고 '제작'이라고 씀. 만듬? 만듦? 궁금해서
국립국어연구원에 물어보니 '만듦'이란다. 그래서 다시 지우고 만듦이라고 씀.
수정테이프 자국에 크고 진한 글씨로 '만듦'이라고 써 넣게 되었다.)
2000년 9월 1일 복학
(일행시 '사랑: 빨어 빨어 존나 빨어 싸싸 존나 싸' 뭐 이런 시를 시창작의 이론과 실기 시간에
써 냈다가 칭찬을 받았던가 욕을 먹었던가? 여튼 날카로운 감수성의 시절이었다. [대체 뭐가..]
현문반 아이들과 '현문 시화전'을 다시 연 해이기도 하다. 시화전 이름은 신대철 시인의 시
'다시 무인도를 위하여'에서 따온 "우리를 노을로 알고 오는 사람은 없을까요?"였지 아마.
현문반 아이들을 캠에 담아 고대방송국에서 일하던 혜선이의 도움으로 비디오 편집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거 리허설 때 재생버튼인 줄 알고 녹화버튼을 눌러서 제일 신경 많이 쓴
'초반 5분 죽이는 장면'을 날렸지, 아마.
그러고 보니 소중하며 미안한 기억, 애증의 교차로인 아우름-풍물학회-과 현대문학반을
이력에서 빼먹었네. 지금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학회를 두 개 하면서 두 학회를 함께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게 꼭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라고 기억되는데, 아우름 사람들과 불편해지면
현문반 활동을 열심히 하고, 현문반 사람들이 마음에 안들면 아우름 가서 찔벅대고 그랬던 것 같다.
정말 어리석은 인생이었다.)
2001년 3월 1일 휴학, <세븐일레븐> 야간조로 100일 동안 근무
<이화주막>에서 홀서빙
(원배와 성천형을 만났던 때다. 원배와 살면서 나는 조금 더 클 수 있었다. 그 때 막 스무살, 가출해서
무턱대고 날 찾아온 녀석이 벌써 제대해서 스물여섯이 되다니.)
2001년 9월 1일 복학
2001년 9월 20일 자퇴, 자퇴 후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사무보조.
2002년 3월 1일 귀향, <유성 농수산물 공판장 구내식당>에서 한, 중, 일식 배달
2002년 9월 1일 재입학
(2003년 1월에 임실 필봉으로 아우름 사람들과 1주일 동안 첫 전수를 간 기억이 난다.
함께 악기치며 노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지 몸으로 알던 때다.
같이 갔던 새내기들은 집에 가고 싶어 몸을 뒤트는데
나는 아무 할 일 없이 밥먹고, 악기치고, 술먹고, 자고, 밥먹고-해서
무척 해맑게 행복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내 대학 이력에서 몇 안 되는 소중한 이력인 농활도 다 빼먹었네.
나 혼자 새벽에 인력소개소를 뒤져 노가다를 처음 뛴 것도 이 때였던 것 같아.)
2003년 7월 이때부터 방학마다 <우리교육> 교사 연수 아카데미 진행도우미로 일함.
상담연수, 학급운영, 교육학 등 10여개의 강좌를 2006 겨울까지 진행, (무료) 수강
2004년 4월 <에듀네트 학원>에서 중1~고3 국어과 강사. 2005년 9월까지 아이들을 만남
2004년 4월 과내의 첫 국어교육 연구모임인 <신나는 국어교육>을 만들고 시작. 모임원들과 국어교육
관련 책과 논문을 공부
(사실 모임을 '만든' 건 종윤형인데, 모임의 초기 멤버 어쩌고 하기 좀 그래서 그냥 만들었다고 썼다.
모임 만들 때 이야기 같이 나누고 했으니 괜찮겠지요, 종윤형.
공부방 이야기는 쓸까?하는 유혹에 부딪혔다가 그만 두었다. 사실 이력서를 세 번 썼는데, 두 번째에
2004년 9월 공부방 시작, 중1 국어교사로 자원, 2005년 9월에 갑작스레 그만두게 된 것을 지금까지
후회, 라고 썼다가 세 번째에 뺐다. 공부방에 대한 기억은 내게 정말 가슴 아프고 죄송스런 기억인데
그걸 이력서에 쓰려고 했다니, 미쳤지 내가.)
2004년 11월 과 학술제에서 <신나는 국어교육> 학술발표.
일년 간의 학원 경험과 공부를 바탕으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맡아서 발표.
(사실 부끄러운 글이다. 저 정도 분량의 글을 처음 써 보아서 써 낸 것 자체는 대견스럽고,
내가 하는 고민을 아이들과 함께 풀어가려는 '시도'는 멋졌으나 이론만 있고 실제가 빠져버려
분자만 큰 가분수가 되었다. 그 뒤에 계속 연구-실천했으면 뭐, 그 분야의 대가가 되었겠지만
내 가장 큰 단점이 그렇듯, 그 뒤가 좀 더질더질 되었다.)
2005년 2월 독서교육을 공부하기 위해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교사들>모임에 가입, 공부
(요건 사실 좀 부풀리기지 싶다. 책따세 모임에 나가긴 했지만 공부라기 보단 회의가 길었고,
책따세 모임을 6월까진가 하고 그 뒤엔 띄엄띄엄 나갔으니까. 하지만 모임을 꾸려가는 선생님들의
열정과 방법을 '곁에서' 잘 보았고 그것은 큰 공부가 되었겠지. '독서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걸
(남이 준, 돈 주고 산 자격증이 없으니) 스스로 증명하려고 썼다. 써놓고 보니 '독서논술이 대세요
유행이요 메인 스트림인 지금의 시절을 약삭 빠르게 잘 타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아니냐? 아니냐? 아니냐?)
2005년 4월 글쓰기 교육을 깊이 알기 위해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 자료회원으로 가입,
매달 교사들의 성과를 배움
(회보를 받아본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글쓰기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걸 증명하려 했으나 '논술이
대세요 유행인.....' 휴. 신경 끄자.)
2005년 9월 대안교육공부모임인 <교육사랑방>에 가입하여 일반-대안학교 교사, 공부방 상근자와
교사, 학부모, 학생, 교수 등과 대안교육을 공부.
2005년 9월부터2006년 3월까지 고대 교우회보의 <교우회 70년사>란 1000쪽 가까이 되는
책을 한글 작업으로 문서화. 책 속의 한자를 한글로 옮기며 한자, 워드 공부 톡톡히.
(한자, 워드 자격증이 없어서 역시. '잊어 버릴 뻔 했는데' 내게 참 '기억에 많이 남았던' 일이다.
장학금을 받고 했던 일인데, 생각보다 일이 많아서 '씨벌!'했다. 같이 일하던 친구는 성질 버렸다.
부록이 100쪽인데 90%가 한자로 된 사람이름 목록이다. 그걸 다 한글로......하고 나니
담당 교수가 "아 그 부록도 했어? 안 해도 되는데..."했다. 허탈하고 그러진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일을 끝냈다는 생각에 너무 좋아서. 그 때 과사무실 컴퓨터(과사무실 조교보조도 했었지. 1년동안)와
보선이와 형훈이, 채영이가 빌려준 노트북과 규호가 빌려준
전자사전을 내 것 삼아 일을 해서 끝마칠 수 있었다. 음악 무지 들어댔다.
루시드 폴 2집과 김범수의 리메이크 앨범, UMC, 모던 쥬스를 그 겨우내 들어댔다.
동운형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외롭지 않을 수 있었고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가을-겨울이기도.
동운형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1년이 이때부터다.)
2006년 4월 경기도 성남의 대안학교인 <이우학교>로 교육실습
(아이들과 더 가까워지지 못한 게, 교생 끝난 뒤에도 아이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 받지 못한 게
아쉽지만 멋진 선생님들을 만나고 계속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내게 참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이우학교에 가서 100분의 수업을 하고, 교사들의 열린 문화를 맛보고,
아이들의 모습을 들여다 본 것은 참 소중한 경험이었다.
소희를 만날 수 있었으니 이건 뭐 더할 나위 없기는 물론.....)
2006년 8월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졸업하고 나서 우연히 맡게 된 <문승기 수기집 원고 교정>일 역시 기억해 둘 만하다. 그 원고는 결국
<난, 논술로 갔다>란 책으로 나왔다. 논술 잘 써 서울대 법대 들어간 친구 글을 수정하게 되다니.
원고의 70%정도가 교정에 의해서, 교정의 70%는 편집에 의해서 책 꼴을 갖춰가는 모습을 봤다.
일을 맡겨주고, 월급도 대신 가불해주기까지 한 은혜의 은혜는 스승의 은헤.....)
* 학원을 그만둔 2005년 9월부터 지금까지 일년 반 동안 작정하고 백수생활을 하며 여유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음
(이라고 마지막에 쓰면서 '그럼 계속 여유로우세요'라고 할까봐 조금 걱정이 되긴 했음.)
괄호가 더 많아서 글이 길어졌다. 내 청춘의 어느 부분-번쩍이는 명찰의 부분-을 이렇게 기록해 놓으면
나중에 필요할 때 기억을 잘 끄집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적어 놓는다.
하지만 명심할 것! 이 일들, 특히 괄호 안의 일들은 교생과 졸업을 빼면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일들이
어서 이력서를 쓰는 오늘에도 사실 긴가민가, 정말 있었나 내가 만들어 낸 건 아닌가,
고민되는 일들이란 것! 특히 여기에 쓰인 월과 일은 절대 믿을 게 못 된다.
나중에 이 이력을 이용할 때는 주의할 것.
혹시나 "예전 몇년도 몇월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나"식의 논쟁을 하게 된다면
절대로 이 글을 근거 삼지 말 것!
(근데 이걸 이력서로 봐줄까? 결국 내 이력서도 언젠가는 규범의 틀 속에 갇힐 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이력서. 헐! 그 전에 자리를 잡아야겠다.)